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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IES

토로 上

 
 
디오 찬열
 
 
 
 
 
 
 
남편은 잠이 들었다.
수임은 이불을 걷고 일어나 앉아 제 침대와 남편의 침대 사이에 놓인 콘솔 위 스탠드 불을 밝혔다. 그리고 남편의 고요히 잠든 얼굴을 바라보았다.
남편은 늘 천장을 보고 반듯이 누워 미동도 없이 자곤 했다. 어둠 속에서 눈을 감고 있어도 참 잘생긴 얼굴. 맨 처음, 저 얼굴을 보고 가슴이 주책맞게 쿵쿵 뛰던 기억이 생생했다.
제가 잠귀가 좀 밝아서요. 그렇게 말하고 나서 남편이, 그때는 아직 남편이 아니었던 그가 쑥스럽다는듯 피식 웃었다. 침대는 두 개 놓고 쓰고 싶어요. 결혼하게 되면요. 수임은 기분이 이상했지만 친구 유란은 그런 수임을 숙맥 취급하며 핀잔을 주었다. 야, 요즘은 그런 부부들 많아. 혼자 자려다 둘이 같이 자려면 얼마나 불편한 줄 아니. 그리고 서로 조건 맞춰 하는 중매결혼에 그 정도 요구사항은 요구사항이랄 것도 없지. 그 남자, 심지어 엄청 잘생겼다며. 젠틀하고. 수임은 뭐든 자신보다 나았던, 더 예쁘고 똑똑한 유란이 호들갑을 떨자 덩달아 기분이 붕 들떴었다.
주변의 모두가 남편과 결혼하는 수임을 부러워하고 질투했다. 인상이 깨끗하고 참하긴 해도 눈에 띄는 어마어마한 미인은 아니고 학벌이나 집안은 오히려 남자 쪽이 월등히 훌륭한데 남편 같은 남자를 용케 물었다고 비아냥거리기도, 남편에게 알고 보면 변태적인 취향이 있을 거라고 악담을 하기도 했지만. 남편은 거의 완벽한 남자였다. 천성적으로 예의바르고 정중했고 특히 수임을 배려하려고 노력했다. 농담도 할 줄 알고 휴일에는 손수 간단한 요리도 해주었다. 수임이 친정에서 키우던 강아지를 데려오고 싶다고 말하자 흔쾌히 허락해주기도 했다.
기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결혼생활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남편이 수임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만 빼고는. 하지만 그런 것쯤은 미리 알고 있었으니까.
수임은 두 무릎을 세워 안고 그 위에 턱을 괬다. 남편의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얕은 꿈속을 헤매는지 파르르 떨리는 걸 보고 있으니 눈에 눈물이 글썽해졌다. 아무리 입술을 깨물며 참아보려고 해도 참아지지가 않아. 곧 두 뺨이 젖어들고 말았다.
 
 
 
 
 
 
 
─ 오늘도 늦을 것 같아요.
“많이요?”
─ 글쎄요. 저녁 먼저 먹어요. 기다리지 말고요.
 
혼자 먹기 쓸쓸하면 유란 씨하고 먹어도 돼요. 덧붙이는 목소리가 상냥해 수임은 수화기에 귀를 바짝 댔다.
남편이 야근을 하면 수임은 유란을 만나거나 친정에 가 저녁을 먹었다. 남편에게 빈집에서 그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는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외출을 했다가도 곧 돌아와 외출복 차림 그대로 책이나 잡지를 읽으며 남편을 기다렸다. 그런 수임을 보고 남편이 눈을 약간 크게 떴다가
어디 다녀왔나 보네요.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말하면 수임은 그제야 제 기다림을 들키지 않아 안심할 수 있었다.
요즘 들어 남편은 야근이 잦았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수임과 강아지 달이에게 인사를 하고 곧장 욕실로 가 뜨거운 물로 오래 샤워를 했다. 남편이 벗어둔 와이셔츠는 희미한 담배냄새가 배어있었고 소매 부분을 자주 걷었다 풀었다 했는지 주름져있었다. 수임이 없는 공간에서의, 바꿔 말하면 수임이 볼 수 없는 남편의 모습들. 일상들.
수임은 유란에게 메시지를 보내놓고 옷장을 열었다. 단정하면서도 여성스러운 선이 들어간 원피스를 골라 꺼내 입고 머리를 공들여 매만졌다.
오늘은 안 돼. 유란의 답장을 받은 건 이미 택시에 올라 유란이 운영하는 레스토랑 상호를 댄 후였다. 나 출발했는데. 안 돼. 애기랑 열흘 만의 데이트란 말야. 애기란 요새 유란이 푹 빠져있는 대학생이었다. 그녀에게는 약혼자와 몇 명의 애인이 따로 있었다. 수임은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한숨을 삼켰다. 희고 가녀린 손가락이 머뭇머뭇 망설이다 이내 빠르게 키패드를 두드렸다.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 것 같아.
전송 버튼을 누르기가 무섭게 유란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남편이 술에 취해서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울었어.
그게 다였다. 유란에게 말로 하려니 별 일 아닌 것처럼 짧고 간단했다. 그러나 차마 말로 할 수가 없는…… 수임이 느낀 절망과 고독은, 뜬 눈으로 보내야 했던 수많은 불면의 낮과 밤들은.
일주일 전이었다. 남편이 전에 없이 만취해 인사불성 상태로 낯선 남자의 어깨에 둘러매져 왔다. 남자는 남편의 절친이라고 했다. 어쩌다보니 고등학생 때부터 십 년이 넘도록 붙어 다니고 있다고. 눈매와 입꼬리를 아래로 잡아당긴 듯 축 쳐져 있어 대체적으로 귀엽고 유순해보이긴 해도 한 번 보고 쉽게 잊을 만한 인상은 아닌데 수임은 그 남자를 결혼식에서 본 기억이 없었다. 남자는 남편을 침실까지 옮겨주었다. 남편의 침대라고 일러주지도 않았는데 제대로 찾아 눕히고는 별안간 뜻 모를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에 수임이 어리둥절해하자 아니, 아니에요, 하고 변명하듯 손을 내젓더니 시원한 물 한 잔을 부탁해 단숨에 들이켜고 가버렸다. 도대체 뭐가 아니란 걸까.
남자가 가고 나서 수임은 남편의 양말과 재킷을 벗겼다. 남편에게선 지독한 술 냄새가 풍겼지만 처음 보는 그의 흐트러진 모습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수임은 입고 있던 얇은 치마를 벗어 내리고 남편의 곁에 누웠다. 턱 부근에 입을 맞추며 셔츠 단추를 하나씩 푸는 손이 조금 떨렸다. 제 속 어디에 이런 욕망이 숨어있던 걸까. 어색하고 당황스러웠다.
수임의 손이 떨면서도 셔츠자락을 헤치고 들어가 남편의 마르고 단단한 가슴팍을 어루만졌다. 손바닥 아래에 술 때문에 평소보다 체온이 높은 피부가 감겨들었다. 더 이상 어쩔 줄 모르고 그저 쓸고 더듬거리고만 있는데
 
……찬열아.
 
남편이 수임의 손목을 부러뜨릴 듯 세게 붙잡아왔다. 놀랐고, 너무 아팠지만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남편의 입술 틈을 비집고 흘러나온 다른 사람의 이름 때문에.
 
왜……
…….
……왜, 열아.
 
수임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입술 가까이에 가져다 댄 남편이 얼굴을 괴롭게 일그러뜨렸다. 기가 막혀 손을 있는 힘껏 빼내려고 했지만 남편은 놓아주지 않았다. 소중한 걸 뺏기지 않으려는 어린애처럼 매달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한 쪽 손을 내준 채로 수임은 밤새 남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크게 한 번 웃은 적도, 화낸 적도 없이 언제나 표정이 희미하던 얼굴. 마음이 먼 곳에 있어 그랬던가. 남편의 감긴 속눈썹은 마를 줄 모르고 이따금 새로 젖었다. 얼마나 슬프면 자면서도 울까. 미운 마음보다, 속아서 분하다는 마음보다 그가 안쓰럽고 안타까운 마음이 우세해졌다.
 
“그래서, 이혼할 거야?”
 
유란이 눈을 뾰족하게 뜨며 물어와 수임은 그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
 
“모르긴 뭘 몰라. 그것부터 확실히 해둬야지.”
“…….”
“솔직히 나 같음 절대 이혼 안 하지. 너희 남편만 못한 것들도 하루가 멀다 하고 어린 기집애들 갈아치워 가며 돈 쓰고 몸 쓰고 헛짓거리 하는데.”
“…….”
“근데 넌 내가 아니잖아. 아무 것도 모른 척, 아무 일도 없었던 척 못 살 거 아냐.”
“유란아.”
“응.”
“나, 남편 사랑해.”
 
유란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수임에게도 물론 지금의 남편이 아닌 남자들이 있었지만 그 남자들의 일방적인 열정과 구애에 못 이겨 받아들였을 뿐, 수임의 입에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말이 나온 건 정말 처음이었다. 유란은 자리에서 일어나 수임의 옆으로 옮겨 앉았다. 그리고 수임의 머리를 끌어다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으이구, 이 맹추야.”
“…….”
“어떡하려고 그래.”
 
 
 
 
 
 
 
현재진행형은 아닐 수도 있어. 유란이 위로랍시고 꺼낸 말에 그래, 그럴 수도 있어, 수임도 어느 정도는 동의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고, 그건 유란에게도, 세상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수임은 남편이 부른 그 이름의 주인을 알고 있다.
 
‘이제 제가 제수씨라고 불러야겠네요.’
 
크다. 키도 손, 발도. 그리고 눈도. 첫인상은 그랬다. 길고 마른 몸에 딱 맞는 예쁜 수트를 빼입은 남자가 신부대기실에 성큼성큼 들어섰다. 이따가는 정신없어서 제대로 인사도 못 할 것 같아서요. 박찬열입니다. 경수 형이에요. 미리 들은 적은 있었다. 남편 될 사람에게 성이 다른 형제가 한 명 있다고. 친형제는 아니고 집안에서 오랫동안 후원해온 보육원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한 집에서 형제처럼 친구처럼 자라왔다고. 결혼 얘기가 오가자마자 번갯불에 콩 볶듯 급하게 잡힌 상견례 때는 유럽 투어 콘서트 중이라 참석하지 못했다고 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악수 한 번만 할까요?’
 
찬열이 손을 내밀어 수임이 그 끝을 가볍게 마주잡았다. 피아노를 치는 손답지 않게 조금 차갑고 조금 투박했다.
찬열의 상체가 불쑥 내려와 순간 그의 그림자에 덮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찬열은 수임의 어깨를 짚고 몸을 가까이 기울여왔다. 무례하다거나 불쾌하다거나 하지 않고 오히려 한없이 다정하게 느껴지는 몸짓이었다.
 
‘정말 축하드려요, 제수씨.’
 
우리 경수 잘 부탁드릴게요. 가족으로서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래서 수임은 아무 의심 없이 그를 향해 수줍게 웃어보였다.
찬열은 결혼식 내내 처음부터 끝까지 웃고 있었다. 마치 제가 신랑이라도 되는 양. 유명한 피아니스트라더니 식장 내에 눈처럼 새하얀 그랜드 피아노가 설치되었고 찬열이 웨딩마치부터 축연까지 완벽하게 연주해주었다.
그래, 이제와 돌이켜보면 남편은 제 형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었다. 단 한순간도. 피아노 앞에 앉은 찬열의 뒷모습을 애틋하고 사랑스럽게 바라보았지만 수임은 그것까지 신경쓸만한 여력이 없었다. 긴장한 것도 긴장한 거였지만 평소에 잘 신지 않는 하이힐 때문에 뒤꿈치가 아팠고, 무리하게 줄인 드레스가 허리를 옥죄어 숨이 막혔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보다 그때는 남편을 사랑하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돼버렸을까.
수임은 달리는 택시 안에서 차창 밖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날 이후 수임은 결혼식에서 딱 한 번 본 찬열의 모습을 곱씹고 또 곱씹으며 남편이 그의 어떤 부분을 어떻게 사랑하는지 상상했다. 끝이 맵시 있게 빠진 커다란 눈과 붉고 통통한 입술…… 기다랗고 두툼한 손가락으로 피아노를 치는 것처럼 남편의 흰 뺨을, 목덜미를 어루만졌을까. 남편의 귓가에 입술을 붙이고 낮고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웃고 속살속살거리면 남편은 따라 웃을까. 아니면 고개를 돌려 그의 입술에 입 맞출까. 상상하다가 결국은 눈물을 방울방울 떨어뜨리며 이게 뭐야, 뭐하는 거야, 정말 꼴사납게, 자기혐오에 사로잡혔다.
 
 
 
 
 
 
 
찬열은 지금 독일에 머무르고 있다고 했다. 남편은 때로 시간을 확인하고 손가락을 아주 작게 꼽아가며 시차를 계산했다. 남편도 모르는 남편의 버릇이었다. 수임은 못 본 체하며 과일을 깎거나 밀크티에서 티백을 건져내곤 했다.
 
 
 
 
 
 
 
조용한 휴일 아침.
남편은 달이에게 목줄을 채우고 있었다. 자, 착하지. 조금만 기다리자. 남편이 목줄을 넣어둔 서랍을 여는 순간부터 이미 흥분하여 제 자리에서 팔짝팔짝 뛰고 빙그르 돌고 난리가 난 달이를 끈기 있게 달래며. 반려동물을 키워본 적 없다면서도 다행히 달이를 예뻐해 주었다. 달이와 친해지기 위해 시작됐던 일요일 아침의 단둘만의 산책은 친해지고 나서도 이어지고 있었다.
 
“같이 갈래요?”
“아뇨. 오붓하게 다녀오세요.”
 
매번 똑같이 묻고 똑같이 답했다. 인사 대신인 것 같기도 했다. 이럴 때만큼은 엄마바라기인 달이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쌩하니 달려 나갔다. 수임은 현관에서 배웅을 하고 베란다로 나갔다. 맨발로 타일을 딛고 급하게 내다보면 남편과 달이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달이가 활발하게 통통 튀어나가면 남편은 이리저리 이끄는 대로 끌려 다녀 주었다. 그 둘이 멀어져 점처럼 보였다가 아예 안 보이게 되면 수임은 그제야 청소를 하고 세탁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손빨래를 해야 할 것과 세탁소에 맡겨야 할 것을 구분해 정리해놓고 다 마른 옷가지들을 걷었다. 경수는 수임에게 혼자 살림을 돌보기 힘들면 사람을 쓰라고 했지만 어쩐지 내 살림에 남이 손대는 게 내키지가 않았고 그리고 무엇보다 수임은 이런 평온한 일상을 유지하기 위한 행위들을 하는 게 좋았다. 평온하고 소박한, 사랑하는 사람과의 생활.
남편에게 돌아오는 길에 새로 선물 받은 차에 곁들일 만한 케이크나 쿠키를 사다달라고 부탁해야겠다. 남편은 수임이 좋아해 자주 들르곤 하는 과자점을 기억해내 들르겠지. 쇼케이스를 한참 들여다보다가 직원이 추천해주는 케이크를 그럼 그걸로 할게요 라며 포장해오고.
이만하면 행복하다고 할 만하지 않을까. 수임은 바닥에 엎드려 무릎으로 콩콩 걸으며 손걸레질을 해치웠다. 걸레가 지나간 자리마다 반짝반짝 윤이 나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우정 혹은 의리로 살아가면 될 것이다. 남편의 마음속에 다른 누군가가 있다 해도, 어차피 이뤄지지 않을 거라면. 수임은 일부러 챙겨 입은 에이프런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지금의 이 결정을 유란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나 이혼 안 해.
유란이 바로 메시지를 확인하든지 말든지 기다리지 않고 도로 집어넣었다. 콧노래 대신 아예 가사가 있는 노래를 흥얼흥얼 부르면서. 남편과 달이가 얼른 돌아왔으면 생각했다.
 
 
 
 
 
 

 

To be continued
 
 
짧은 글이 되겠지만...
박지윤 <잠꼬대>를 듣다가 쓰기 시작한 이야기입니다. 다음 편이 마지막 편일 거고 경수의 시점일 예정입니다.
오랜만에 쓰는 거라 문장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 괴로웠고, 괴롭지만... 어찌됐든 와 나 드디어 도열 썼다!(노양심
쓸데없는 사족이지만 경수 친구는 백현이가 맞아요.ㅋㅋㅋ 경수의 친구이자 찬열이의 친구입니다.'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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