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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IES

토로 下 / End

 
 
디오 찬열
 
 
 
 
 
 
 
오랜만에 청소를 했다. 베란다창부터 부엌에 난 쪽창까지 집안의 창이란 창은 전부 열어 환기시키고 냉장고 정리를 했다. 그새 상하고 시들어 못 먹게 된 건 버리고 먹을 만해 보이는 건 잘 손질해 냉동고로 옮겼다. 오는 길에 세탁소에 들러 맡겼던 세탁물들도 찾아왔다. 남편의 와이셔츠와 수트였다. 비닐을 벗겨 걸어두려고 옷장을 여니 군데군데 빈자리가 눈에 띄었다. 아마 남편이 챙겨간 거겠지. 따로 챙겨주지 않으면 손이 가는대로 입던 것만 입었으니까 무채색의, 선이 단정한 걸로 몇 벌 골랐을 것이다.
 
‘내가 잘못한 건데 왜 수임 씨가 나가 지내요.’
 
남편이 회사에 있는 시간에 전화가 걸려오는 건 매우 드문 일이었다. 입맛도 없고 먹을 것도 없어 플레인 요구르트에 시리얼을 말아 대강 씹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핸드폰 액정에 뜬 남편의 이름을 보고 너무 놀라 받을까 말까 망설일 겨를도 없이 받아버렸다. 수임이 유란의 집에 죽치고 있은 지 보름 만이었다.
 
‘집에 들어와요. 나는 당분간 친구 집에 가있기로 했어요.’
 
남편의 목소리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덤덤했다.
 
‘달이도 영 기운이 없고요. 엄마가 보고 싶은가 봐요.’
 
그날 새벽. 수임은 눈물이 말라 더 이상 나오지 않을 때까지 울었다. 다 울고 나서 방문을 열고 나왔을 때 남편은 양손으로 핸드폰을 꽉 쥐고 이마를 기댄 채 소파에 미동도 없이 앉아있었다. 수임은 천천히 남편의 앞을 지나 거실을 가로질렀다. 자신이 꼭 발 없는 유령이라도 된 것 같았다. 남편에겐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늘 그랬듯 온 신경이 다른 데 팔려있어. 눈을 깜빡거릴 때마다 물기가 남아있지 않아 뻑뻑한 표면이 쓰라렸다. 수임이 납작한 샌들을 구겨 신고 현관문을 나서도록 남편은 아무 말이 없었다.
남편은 수임에게 집에 들어와 있으라고 했지만 마음속이 지옥이니 몸이야 어디에 있든 마찬가지였다.
엄마가 보고 싶어 기운이 없다던 달이는 전혀 그래 보이지 않았다. 배신감이 들 정도로. 수임이 없는 동안 남편이 서툴게나마 잘 돌보아주었는지 입 냄새도 없고 털도 매끄럽게 윤기가 흘렀다. 수임이 반갑긴 반가운지 꼬리를 프로펠러처럼 힘차게 치며 뒤를 졸졸 쫓아다니다가 이내 제가 좋아하는 쿠션에 올라가 낮잠에 빠졌다.
헤어지고 싶지 않아.
보름동안 그 생각을 가장 많이 했다. 반 년 가까이를 부부로 살았는데 헤어지면 이대로 남남이 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이 꼴을 당하고도 헤어지고 싶지 않다니 내가 머리가 어떻게 되기라도 한 걸까.
하지만 그 사람의 전화를 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핸드폰을 뺏어가던 남편의 눈빛은…… 아마 평생 잊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혼, 해주는 수밖에.
수임은 마지막으로 걸었던 남편의 와이셔츠를 다시 내렸다. 흰 바탕에 아주 엷고 가는 은빛 선이 들어간 것으로 수임이 처음으로 남편을 생각하며 샀던 셔츠였다. 고마워요, 정말 예쁘네요. 그렇게 말하며 미소 짓던 남편의 조용한 입술. 당장 입어보고 거울에 이리저리 비춰보고 그런 호들갑은 떨지 않았어도. ……정말 헤어지고 싶지 않아. 수임은 남편의 셔츠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경수가 출퇴근 시간이 일정한 것에 비해 백현은 들쭉날쭉이다. 그래서 이런 상황이 연출되고 만 것이다.
식탁 위에는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돌았다. 세훈은 자신이 손수 차린 구첩반상을 무시무시한 기세로 먹어치우고 있었다.
도어락을 해제하는 소리에 경수는 당연히 백현이 돌아왔겠거니 했다. 그런데 읽던 책을 내려놓고 슬슬 나가보니 웬 남자…… 애가 서 있었다. 양손에 근처 대형마트의 비닐봉투를 바리바리 들고서. 그 남자애는 일별에 경수를 머리꼭지부터 발끝까지 쭉 훑더니 대뜸 그랬다.
혹시 박찬열이세요?
……아뇨.
그럼 누구세요?
…….
전 오세훈이고, 변백현 형 애인인데.
도경수입니다. 친구예요.
아.
그제야 세훈은 뾰족하던 눈매를 풀고 식탁 위에 비닐봉투들을 올려두었다.
형한테 말씀 많이 들었어요. 젤 친한 친구시라고요.
경수는 들은 적 없다. 집 비밀번호까지 공유하는 애인이 있다는 말은. 애인이라기엔 어려보이는데.
그리고 박찬열 애인이기도 하시고요.
……초면에 말을 함부로 하네요.
죄송해요. 그쪽 애인한테 하도 데어서 그런가 그쪽한테도 말이 곱게 안 나가네요.
세훈은 비닐봉투에서 나오는 온갖 식재료와 생필품을 부지런히 정리하며 톡톡 쏘듯이 말했다. 그렇다고 진짜 악의가 느껴지는 건 아니었지만.
백현은 원래부터 유독 찬열에게 약하긴 했었다. 찬열도 그걸 잘 알아서 경수에게 하지 못하는 말을 백현에게 하곤 했었고. 그래서 찬열이 마음먹고 잠적했다는 걸 알았을 때 경수는 다짜고짜 백현부터 드잡았다. 넌 알지, 박찬열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숨었는지. 백현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해 입을 떡 벌리고 있다가 버럭 소리쳤다. 야! 내가 박찬열을 좀, 좀 많이 이뻐하긴 해도 나 니 친구야, 인마!
세훈이 앞치마까지 야물딱지게 찾아 입고 저녁상을 차리는 동안 경수는 핸드폰을 찾았다. 백현이 우겨서 와있던 건데 역시 호텔로 가는 게 나을 것 같아서였다.
메시지를 쓰고 있는 중에 전화가 들어와서 얼떨결에 통화키를 누른 모양이었다. 통화가 연결된 줄도 몰랐다가 여보세요? 경수야 도경수? 하는 백현의 목소리가 짜랑짜랑하게 울려 알았다. 세훈이 바람 소리가 날 정도로 홱 돌아봤다.
나 오늘 늦겠다 야.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라. 경수가 언제 백현을 기다렸다고 다정을 떠는지 모르겠어서 어리둥절해 있는데 세훈이 다가와 손을 슥 내밀었다. 왠지 그래야 될 것 같아서 잠자코 핸드폰을 넘겨주자 세훈이 혀엉 하고 애교 듬뿍 섞인 목소리를 냈다. 웃으니 눈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구부러졌다. 광대가 볼록하게 솟아 반짝반짝 빛나는 게 예쁘긴 정말 예쁜 애다 싶었다. 버릇은 좀 없어도. 하긴 변백현은 예쁜 거라면 사족을 못 쓰니까.
다시 바꿔주려나. 호텔로 가겠다고 말해야 하는데. 멍하니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세훈의 웃음이 뚝 멎었다. 백현이 무슨 말을 했는지 우물에 빠져 죽은 처녀귀신처럼 원한 가득한 싸늘한 표정으로 바뀌어.
세훈은 끊긴 핸드폰을 쥔 손을 스르륵 내리고 경수를 향해 음산하게 물어왔다.
아직 식사 안 하셨죠?
만약 경수까지 안 먹겠다고 했으면 세훈 혼자 다 먹을 작정이었을까.
야. 걔 지금 속이 말이 아니니까 괜히 까불지 말고 가, 라는데요. 그래도 밥은 먹고 갈래요. 그 말을 끝으로 세훈은 말 한마디 없이 변백현을 위해 밥 한 톨 남겨놓지 않겠다는 의지로 입에 꾸역꾸역 밀어 넣고 있었다. 저러다 체할 것 같은데. 경수는 속으로만 생각하며 물컵을 슬쩍 밀어주었다.
세훈은 물컵까지 싹 비우고 나서 허리를 쭉 펴며 숨을 몰아쉬었다.
 
“요즘 박찬열하고 안 좋으시다면서요.”
“…….”
“포기 안 하실 거죠?”
“…….”
“하지 마세요.”
“…….”
“백현이 형은 곧 죽어도 친구라고 하지만 난 안 믿어요.”
 
뜻 모를 소리를 하더니 설거지까지 해치우고 가버렸다. 미운 건 미운 거고 설거지는 해야지 하면서. 경수가 자신이 하겠다고 나서니 손사래를 쳤다. 나중에 비싼 밥 쏘세요. 부자시잖아요.
경수가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백현은 별로 크지도 않은 눈을 한껏 크게 뜨더니 곧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펄펄 뛰었다. 야 너 그 결혼 하기만 해. 나 너 다시는 안 봐 알겠어? 다시는 안 본다고! 바닥에 부스러진 유리 파편을 보고 나서야 백현이 자신에게 소주잔을 집어던졌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놓고 결국 또 보고 있지만.
 
“너한테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박찬열 지랄 많이 했어.”
 
울고불고 죽고 싶다고 난리치고. 그거 말리러 다니느라 오 분 대기조 노릇하는 거 보고 애가 의부증 걸려서 그래.
 
“난 그때 걔 죽을까봐 진짜 무서웠다.”
 
백현은 샤워를 하고 나와 푹 젖은 머리에 편한 옷차림으로 캔맥주를 홀짝홀짝 마시며 말했다. 경수는 차가운 캔을 만지작거리기만 할 뿐 따지도 않았다.
지금에야 말하는 거지만 그땐 말 그대로 진짜 무서웠다. 죽는다, 죽고 싶다 그 비슷한 말만 들어도 피가 말랐다. 찬열은 매일 울고 매일 술을 마셨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피아노 앞에 앉아 웨딩마치를 뚱땅거렸다. 백현은 이게 미쳤나 하긴 미치지 않고선 버틸 수 없겠지 하고 납득했다. 매일 출퇴근길에 찬열의 오피스텔에 들러 끼니를 챙겨 먹였다. 업무시간에도 시간마다 전화를 걸어 뭐하는지, 기분은 좀 어떤지 확인했다. 그러니 세훈이 오해하고 찬열의 이름만 나오면 질색팔색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눈을 뜨자마자 찬열의 생사를 확인하러 쫓아갔을 때 찬열이 말쑥하게 차려입고서 백현을 맞이했다. 얘가 기어코 죽으려고 이러나. 코끝이 찡해져 현관에 서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쳐다보고만 있자
근데 너 왜 그 꼬라지로 왔어?
찬열이 물어서 자신의 옷차림을 내려다봤다. 내 꼬라지가 뭐 어때서. 흰색 반팔 티셔츠에 베이지색 면 반바지, 슬리퍼…… 심하게 편하긴 해도 꼬라지 소리 들을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진짜 안 가?
가긴 어딜 가? 되물으려다가 아 그래 오늘이 도경수 결혼식날이구나 했다.
너 거기 가게?!
형인데 그럼 안 가?
형은 무슨 형! 니가 거길 왜 가!!
가야 돼. 나 피아노 쳐주기로 했단 말야.
그때 눈치챘어야 했다. 박찬열이 굳이 거기에 가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이유를.
경수의 결혼식에 다녀온 찬열의 소감은 짧았다. 경수 턱시도 입은 거 멋있어. 시무룩하긴 해도 우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백현아 나 이제 괜찮아. 그래서 백현은 섣불리 안심해버렸다.
어느새 빈 캔을 구겨 쥐고 백현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안자냐? 난 그만 잘란다. 경수가 아무 말이 없어 백현은 어깨를 으쓱 들었다 놓고 경수의 손아귀에서 미지근히 식은 캔을 빼냈다. 들어가서 자라. 거실 불을 끄자 순식간에 어둠이 들어찼다. 넓은 창을 통해 들어오는 도시의 불빛이 어른거리며 경수의 옆얼굴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찬열에게 보여주고 싶다, 고 생각했다. 경수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잖아. 우리가 서로에게 벗어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 그렇게 말했던 찬열에게.
백현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서둘러 방문을 닫았다. 경수의 고독이 긴 꼬리를 끌며 따라붙기 전에.
 
 
 
 
 
 
 
생각해보면 어머니와는 늘 미묘하게 사이가 삐걱거렸다. 결혼하고 떨어져 사는 동안 잠시 잊고 있었을 뿐.
수임은 결혼 직전까지 쓰던 제 방 침대에 걸터앉아서 벗어두었던 스타킹을 도로 주워 신경질적으로 발을 끼워 넣었다.
아침에 어머니가 전화를 해 섬에 사는 먼 친척이 생물 전복을 보내주었으니 남편과 함께 저녁을 먹으러 오라기에 분명히 남편은 일 때문에 바쁘니 혼자 가겠다고 했었는데. 수임이 친정에 도착해 불편한 원피스를 훌훌 벗어던지고 남동생의 면 티셔츠와 반바지로 갈아입었을 때 남편의 메시지를 받았다.
 
[어머님, 아버님께서 뭘 좋아하실지 몰라서 꽃하고 술 한 병 준비했는데 괜찮을까요?]
 
수임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네? 저희 부모님이요? 하고 묻자 남편은 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낮에 어머님께 연락 받았어요. 저녁 식사 초대해주셔서 가겠다고 했는데…… 수임 씨도 알고 있다고 하셔서 그런 줄 알았어요.]
 
엄마! 수임이 발을 쿵쿵 구르며 부엌으로 뛰어 들어가자 어머니가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 시집까지 가놓구선 조심성 없는 것 좀 봐라. 너 니 신랑 앞에서두 이러는 건 아니지?
 
“엄마, 경수 씨한테 전화했어?”
“얘는 아직도 경수 씨가 뭐니, 경수 씨가. 남들이 들으면 못 배웠다구 흉 봐.”
“전화했냐고!”
“그래, 했어. 다 먹고 살자고 일하는 건데 웬만큼 바쁜 거 아니면……”
“엄마!!”
“아이 깜짝이야. 아니 근데 얘가 왜 자꾸 큰소리야?”
“내가 그 사람 바쁘다고 했잖아! 바쁜 사람한테 왜 전화해서 부담을 주고 그래!”
“부담을 주긴 뭘 부담을 줬다 그래! 내가 이쁜 내 사위한테 맛있는 것 좀 해먹이고 싶어서 전화했는데 그게 뭐 잘못됐어?!”
 
도서방은 괜찮다는데 지가 더 난리야. 지 혼자 잘나서 결혼한 줄 알고 유세 떨지. 수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머릿속이 하얘지고 온몸이 떨려 제대로 서있을 수 없어 간신히 돌아서는 수임의 뒤통수에 어머니는 버럭 소리쳤다. 도서방 오기 전에 옷이나 갈아입어!
어머니가 굳이 콕 집어 말해주지 않아도 수임도 잘 알고 있었다. 이 결혼의 일등공신은 누가 뭐래도 제 어머니였다. 남편이 외모도 조건도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수임을 선택했다고 해도 그건 그 자리에 수임이 아닌 누가 나갔어도 마찬가지였을 테니. 어머니가 수임을 남편의 눈앞에 들이밀기 위해 수임으로선 상상 못 할, 하고 싶지도 않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수임이 이혼하겠다고 하면 아마 어머니는 머리를 싸매고 앓아 누울 지도 몰랐다. 수임에게 참으라고 무조건 참고 버티라고 할지도.
골목으로 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수임은 일어나 화장대 앞으로 가 섰다. 거울을 보며 눈 아래에 점점이 떨어져있는 마스카라 가루를 털어냈다. 화장을 할까 말까 하다가 그래도 간단하게나마 하고 와 다행이었다. 남편이 도착했다, 고 생각하자 심장이 또 주책없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남편은 눈에 띄게 야위었지만 여전히 정갈하고 우아했다. 남편이 건넨 꽃다발을 받은 어머니는 소녀처럼 볼을 붉히며 기뻐했다.
남편은 언제나 그랬듯 말수는 적었지만 예의바르게 잘 웃고 잘 먹었다. 수임조차 남편에게 그리고 남편과 자신 사이에 아무 문제도 없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남편의 옆에 앉아 그의 콧날을, 뺨을 보며 스스로를 상기시켰다.
지금 이 남자는 아프다. 너무 아파 아프다고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할 만큼.
이대로 모른 척 살 수는 없다.
다행히 수임의 부모님은 어떤 이상한 낌새도 알아채지 못했다. 자고 가라는 걸 침대가 좁아 불편하다는 핑계로 겨우 겨우 마다했다. 남편이 차를 빼오는 동안 어머니는 수임과 언제 투닥거렸냐는 듯 안고 등을 두드려주었다. 딸 내외가 나란히 있는 모습을 보니 새삼스럽게 뿌듯하고 벅차오른 모양이었다. 엄마 미안해. 그치만 내가 이렇게 된 건 엄마 때문이야. 수임은 어머니의 품에서 빠져나와 차 조수석에 올라탔다. 안전벨트를 매고 차가 출발할 때까지 일부러 뒤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더 참지 못하고 눈물을 쏟을 것 같아서였다. 차가 어느 정도 멀어지고 나서야 백미러를 통해 여태 대문 앞에 선 부모님을 보았다. 수임이 차창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자 남편이 조용히 오디오를 켜주었다.
 
 
 
 
 
 
 
주차장에서 차가 멈추었지만 경수도 수임도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 수임은 눈으로 아파트 맨 꼭대기 층부터 한 층 한 층 짚어 내렸다. 달이를 두고 나오느라 거실 불을 켜둔 탓에 환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있잖아요.”
 
수임은 무의식적으로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결혼하고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이 반지를 빼 본 적이 없었다.
 
“이런 말 이상하게 들리겠지만요.”
“…….”
“나는…… 경수 씨가 미안하다고 하면 용서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
“…….”
“……그러고 싶어요. 경수 씨하고 다시 잘 해보고 싶어요.”
“…….”
“……안되겠죠?”
“……미안해요.”
“…….”
“미안합니다.”
 
경수는 핸들을 잡고 있던 손으로 제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올렸다. 눈자위며 귀 끝이며 온통 벌겋게 달아올라 있어 수임은 그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까봐 덜컥 겁이 났다.
 
“실은…… 그래요. 내가 수임 씨한테 매달려야 하는지도 모르겠어요. 수임 씨와 이혼하고 나면 그 다음 일은 너무 막막해서 생각하고 싶지 않을 정도니까요.”
 
경수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격양되어 있었다. 불길처럼 뜨겁고 빠르게 일어나 모든 걸, 자기 자신마저도 태워버릴 듯. 수임은 그가 하는 말을 빠짐없이 들어주기 위해 무릎 위에 얹힌 두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울지 않겠다, 다짐했다.
 
“그 애는 이미 떠났고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지도 몰라요. 돌아온다고 해도…… 그 애의 가장 소중한 걸 빼앗기고 어쩌면 날 평생 미워하게 될 지도 모르고요.”
“…….”
“수임 씨는 좋은 여자예요. 수임 씨와 이대로 결혼 생활을 유지하면서 아이를 낳아 기르고 살림을 늘려가면서 살아가는 게 우리 모두를 위한 길일 수도 있을 거예요.”
“…….”
“하지만 난…… 그 애가 떠난 날부터 매일, 매 순간 어떻게 하면 그 앨 되찾아 올 수 있을까 그 궁리만 하면서 살아요.”
“…….”
“그것 말고는 다른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 어떻게 수임 씨에게 더 속아달라고 할 수 있겠어요?”
 
수임은 비로소 마지막의 마지막이 다가왔음을 실감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수임은 손을 들어 경수의 뒷목을 짚었다. 그는 놀란 듯 눈을 조금 크게 떴지만 수임을 밀어내지는 않았다. 손에 힘을 주어 끌어당기자 그의 고개가 스르르 수임의 가슴으로 떨어져 내렸다. 남은 다른 손을 남편의 몸 위로 크게 두르자 그를 온전히 끌어안은 모양새가 됐다.
 
“이 말은…… 하는 것보다 안 하는 게 나을 것 같지만요.”
“…….”
“나 경수 씨 좋아해요. 처음부터는 아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랬어요.”
“…….”
“앞으로 많이 힘들어지겠지만…… 힘내세요. 내가 도와줄 일이 별로 없을 것 같아서 미안해요.”
 
수임의 희고 가느다란 두 팔 안에서 경수의 몸이 점점 가라앉았다. 수임은 남편의 새까만 정수리에 입술을 묻고 목 끝까지 차오른 뜨거운 덩어리를 꾹꾹 내리 눌렀다. 후련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을 할 수 있어서, 제 밑바닥까지 내보이지 않고 헤어져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그렇게 여기기로 했다.
수임은 고개를 들어 먼 곳에서 별처럼 빛나는 창을 바라보았다. 제겐 과분할 만큼 완벽한 사랑하는 남편과 자식 같은 달이와 함께 지내온 곳. 달이는 자신의 생에 누군가가 갑자기 나타났다가 또 갑자기 사라지는 걸 이해할 수 있을까. 이제는 머리보다 몸이 먼저 기억하고 반응하는 일요일 아침의 산책도 할 수 없게 돼버렸다는 것도.
 
 
 
 
 
 
 
오늘 도경수 지 처가에 가서 밥 먹고 온다더라.
아무리 생각해도 변백현은 참 뻔뻔했다. 지난번에 세훈을 그런 식으로 돌려보내놓고 사과는커녕 제대로 된 연락 한 통 없다가 전화를 걸어와 대뜸 그랬다.
집에 와. 올만에 집에서 데이트나 하자.
세훈이 어이가 없다 못해 지금 숨이 드나드는 게 콧구멍인지 입구멍인지 핸드폰을 든 채 턱만 빼고 있자 백현은 네 마음 다 안다는 듯 실실 웃으며
내가 너 좋아하는 가게에서 초밥 포장해갈게. 넌 맥주만 딱 사서 냉장고 야채칸에 넣어놔. 초밥에 시이—원한 맥주. 어때? 콜? 콜?
귀여움을 떨었다. 물론 세훈은 화가 단단히 난 상태였으므로 그딴 되도 않는 애교질로 넘어가 줄 생각은 없었지만
어디까지나 세훈의 신조가 그랬다. 눈을 보지 않고 대화를 나누다보면 쓸데없는 오해와 갈등이 가지 치게 마련이니 싸울 땐 싸우더라도 눈은 꼭 보고…… 그냥 백현이 보고 싶은 거라고 존나 인정하기는 싫었다.
맥주와 아이스크림과 간단한 씹을 거리가 든 편의점 비닐봉투를 손목에 걸고 세훈은 발걸음을 총총 빨리했다. 날이 제법 더워져 등줄기를 따라 땀이 솟아 백현이 오기 전에 샤워부터 하고 싶었다.
이혼 위기라더니 처가에는 왜 갔대. 갔다 언제 오는 거지. 오긴 오는 건가.
백현과 오붓하게 보낼 시간이 얼마나 되려나 헤아려보다가 백현에게 물어볼까 하고 핸드폰을 꺼냈다.
 
“……아!”
 
전화를 했더니 통화중이라는 안내멘트가 나와 바로 메시지창을 띄웠다. 핸드폰에 코를 박고 두드리느라 맞은편에서 사람이 오는 걸 미처 못 보고 부딪쳐버렸다. 세훈도 마르긴 했지만 키가 커서 어디 가서 꿀리는 체격은 아닌데도 몸이 휘청거리며 밀려났다.
 
“괜찮으세요?”
 
그나마 상대방이 세훈의 팔을 반사적으로 꽉 붙잡아와 볼썽 사납게 나자빠지는 불상사는 모면했다.
아 예 감사합니다…… 세훈은 입술만 움직여 옹알거렸다. 상대방은 세훈이 다리에 힘을 주고 똑바로 섰는데도 세훈의 팔을 놓지 않고 기다렸다가 괜찮다는 대답을 듣고 나서야 놓아주었다. 우와 손 짱 커, 생각하며 눈을 들었는데 그런데도 상대방의 눈높이가 높이 있었다. 손 뿐만 아니라 키도 세훈보다 반 뼘은 더 큰 것 같았다.
별로 위협적인 인상은 아니었다. 눈이 크고 동그래서 그런가.
와 미인이네.
성별과 관계없이 말 그대로 미인이었다. 저도 모르게 감탄하다가 상대방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떠오르는 걸 보고 정신을 수습했다.
 
“죄송합니다. 앞을 똑바로 보고 다녔어야 되는데.”
“아니에요. 저도 마찬가진데요.”
“저 그럼…….”
 
세훈이 가볍게 눈인사를 하자 상대방이 웃었다. 끝이 길게 빠진 눈꼬리를 꾹 누르며 환하게. 그리고 들고 있던 핸드폰을 귀에 가져갔다. 어 미안. 누구랑 좀 부딪쳐서. 아니 다친 건 아니고. 낮고 밀도 있는, 듣기 좋은 목소리.
어 그러고 보니.
세훈이 우뚝 멈춰서 뒤를 돌아보았다. 이 복도의 끝에 있는 건 백현의 집뿐이었다. 상대방은 어느 새 길고 늘씬한 다리로 성큼성큼 멀어져 모퉁이를 돌아 결 고운 머리카락 끝만 언뜻 보였다가 사라졌다.
세훈은 붙박힌 듯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손 안의 핸드폰이 길게 진동할 때까지.
 
 
 
 
 
 
 
End
 
 
이게 끝????? 정말?? 네... 끝입니다.
경수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딴 살림을 차릴 만큼 철면피는 못 되고 찬열이는 아무리 모질게 마음을 먹어봤자 결국 경수를 떠나지 못한다는 뭐 그런 이야기.
백현인 찬열이 안 좋아해요. 오히려 경수를 좋아하면 좋아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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